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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생활/영화 리뷰

<버닝> 우리에게 낡고 쓸모 없는 것은 무엇인가?

by 정원 urban831 2019.05.13

버닝

버닝burning의 사전적인 의미는 '태우다' '불타다'는 뜻 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이다. 불태우고 열중하고 싶을 때 쓰는 말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쓰이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 이창동 감독 인터뷰 중

전자는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 되는 앞선 세대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열망. 후자는 그 후 버닝된 세계에서 살게 된 젊은이들의 상실과 무력감. 이 영화는 쓰여지고 버려진 아버지 세대에서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진 아들로 전의된 분노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낡고 쓸모 없는 것

젊은 나이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위해 인생을 바쳤던 아버지는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산업의 일꾼이었고 베트남 참전 용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80~90년대 남들 다 하던 부동산 투기를 반대하고 모은 돈으로 시골에서 농사꾼으로 살아가던 애국자였습니다. 그의 현재는 어떤가요? 그에게 남은 것은 암소 한 마리 뿐입니다. 반면 땅을 사고 건물을 샀던 이들은 일하지 않고도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갑니다.

아버지는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분노는 결국 국가를 향했던 것이죠. 한때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우직하고 자존심 쎈 이 남자는 지금 너무나 낡고 쓸모없어 보입니다.

해미와 종수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소설가를 지망하는 종수(유아인 분)는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용직으로 살아가고, 해미(전종서 분)는 카드 빚에 쫓겨 나레이터 모델을 하며 작은 옥탑방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세대가 국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면 자녀 세대는 자본을 위해 삶을 바치고 있습니다.

종수가 일하는 곳은 아르바이트 지원자들을 숫자로 부릅니다. 종수가 빠져도 언제나 그 자리를 채울 젊은이들은 많습니다. 하나의 인격체가 단순히 숫자로 불리우는 이곳은 바로 자본주의의 세계입니다. 그들은 낡진 않았지만 가난하고, 그래서 약하고, 그래서 쓸모 없는 존재입니다.

"한국에는 위대한 개츠비가 너무 많아."
"개츠비가 뭔데?"
"뭐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미스테리한 인물."

벤(스티븐 연 분)은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의문의 남자입니다. 그는 여행을 다니고, 포르쉐를 몰며, 그냥 노는게 일이라고 하는 돈 많은 젊은이입니다. 그는 매우 사려 깊고, 친절하며, 사교성 있고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새롭고 쓸모 있는 것들을 잔뜩 가졌습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19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 만들어진 아케이드를 통해 자본주의의 유년기를 관찰한 단편적인 기록의 거대한 모음집입니다. 아케이드는 지금의 백화점과 같은 곳입니다. 유행하는 옷과 전시장, 향수와 보석, 매춘, 예술 모든 것이 화려한 유리 천장 아래에 길을 따라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는 설명하지 않고 보여줍니다. 보여 줌으로 써 느끼게 만든 것이죠. 예를 들자면 이런식입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중년의 남성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손님이 가게로 들어오자 "손님. 어서 오십시오." 하며 재빨리 일어나 계산대 앞에 섰다.

자본주의가 태생하며 바뀐 노동과 소비의 변화를 메모와 스케치, 단편적인 기록을 13년 동안 모아둔 자본주의의 파편들입니다. 벤야민는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지금 이 기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작은 단서 하나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세계(판타스마고리아)란 어쩌면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도 불구하고, ‘권태와 무위’ 속에서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의 상태’를 살아가게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이런 세계는 사유의 불가능성을 조장한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들 속에서 사유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조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P.167

여기서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추구란 소비자로서의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즉 자본주의에서는 새로운 것을 사지 않으면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 상태'를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한 세계는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오직 새로운 것을 사는 것 만이 일상적 진부함을 벗어나는 일이고 가치가 있는 일이기에 '돈'을 가진자가 가치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물

"너 왜 남자들 앞에서 그렇게 옷을 벗고 다니냐? 그런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

종수의 말에 충격을 받은 후 해미는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종수 조차도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적어도 종수 만큼은 그것을 깨닫게 되었죠. 종수는 젊은이들을 숫자로 부르는 택배 회사에서 뛰쳐나와 비닐 하우스를 찾아다닙니다. 각성하게 된 것이죠.

해미는 주인공을 스몰 헝거(본능적 욕망)에서 그레이트 헝거(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인간)로 이끄는 전형적인 히로인입니다. 그에게 각성의 계기를 주는 인물이죠. 마을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냐? 없었냐? 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종수가 살아오면서 했던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벤이 자본주의가 낳은 유산으로 상징화 될 수 있다면 해미는 자본주의의 유산에게 희생됬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낡고 쓸모 없는 것을 태운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 모든 것을 태운 이 자리에는 화려한 타워펠리스가 들어섰다.

벤은 낡은 비닐 하우스. 즉 가난, 약함, 낮음을 태워 없에는 것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고 합니다. 낡은 것을 없에는 것은 새로운 것만 있는 세계를 더욱 빛나게 해줄테니까요. 그 바로 자본주의의 동력입니다.

하지만 종수에게 낡고 쓸모 없는 것은 바로 포르쉐와 벤과 자신의 낡은 옷즉 기성 세대의 오래된 유산인 아무것도 사유할 것이 없는 세계입니다. 독재와 자본이 만든 끔찍한 세계. 종수는 결국 이 세계를 파괴하기 위 소설이라는 유와 상징의 세계로 들어가 벤(기성 세대의 유산)을 죽입니다.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여운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호감을 가지고 보긴 했지만 이런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의미 해석은 이쯤에서 줄이고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단편 소설 <태양은 가득히> 한 장면을 옮깁니다. 은유의 세계로 들어가 친구를 구하려고 하는 플롯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영화 말미에 문득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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